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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20, 2020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31)]“영혼 없는 공무원은 다 처벌?” “양파 깎으라면 깎을 뿐”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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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공무원

“영혼 없는 공무원은 다 처벌?” “양파 깎으라면 깎을 뿐”

법원행정처 심의관에게 보고서 작성 지시 놓고 ‘직권남용’ 공방
피고인 측 “명백히 위법한 지시가 아닌 한 그것에 따를 의무 있다”
검찰 “지시 따랐다 하더라도 하급자가 원칙 어겼다면 처벌해야”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관료제 조직만큼 좋은 게 없다. 윗선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관료제 조직은 성과를 내는 데 효율적이다. 그런데 그 지시가 위법·부당하다면 어떨까. 그래도 지시를 따라야 할까.

사법농단 재판에서 ‘영혼 없는 공무원’이 화두가 되고 있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처장·차장·실장 등이 법원행정처 심의관에게 법관 독립 침해 우려가 있는 내용을 검토해 보고서로 작성하도록 지시한 것을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거론됐다.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위법·부당한 지시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으로 인정돼야 한다.

피고인들은 법원행정처가 관료제 행정조직이기 때문에 ‘명백히’ 위법한 지시가 아닌 한 하급자에게는 상급자 지시에 따를 복종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상명하복 질서에서 하급자 행위는 쉽게 ‘의무 없는 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은 위법·부당한 지시를 하급자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고, 상급자의 지시에 따랐다 하더라도 하급자가 ‘원칙·기준·절차’를 어겼다면 처벌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행정조직 내부에서 벌어진 (위법적인) 일은 국가의 위법을 시스템화한다”는 게 검찰의 말이다.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상당수의 전직 심의관들은 보고서 검토·작성 지시를 받았을 때 특별히 위법·부당한지를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심의관들은 일반 공무원이 아니다. 누군가를 심판하는 법관이다. 그들의 영혼은 언제 어느 대목에서 발현될까.

■“손발일 뿐” vs “영혼 있어야”

공무원이 ‘사인’을 대상으로 한 직권남용 사건은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사인은 공무원 지시를 따를 의무가 있을 리 없다는 점에서 당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으로 인정됐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사기업에 미르·K스포츠 재단 후원과 특정인 채용을 요구한 행위가 그 예다. 문제는 행정조직 내부에서 발생한 직권남용 사건이다. 최근 몇 년간 상급공무원이 하급공무원에게 한 지시에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상급공무원을 기소한 사건이 늘었다. 피고인들이 하급자는 별다른 권한을 갖고 있지 않고, 권한이 있는 상급자 지시를 수행할 의무에 따라 손발 역할을 했을 뿐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보조자’ 논리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대표적이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유재수 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감찰 무마 혐의를 두고 “감찰 중단에 대한 최종결정권은 나에게 있다”며 직권남용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바로 이런 맥락이다.

하급자가 보조자라고 바로 무죄는 아니다.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인사담당 장학관에게 특정인이 승진하도록 인사안을 조정시킨 사건에 대한 2011년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직권남용죄 적용이 행정조직 내로 확대됐다. 대법원은 상급자가 자신의 직무를 하급자에게 단순히 보조하게 했더라도 하급자가 지켜야 할 ‘직무집행의 기준과 절차’가 법령에 명시돼 있고, 이를 위반하게 시킨 때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 1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판결에서 대법원은 더 명확히 기준을 세웠다. 상급자 지시 때문에 하급자가 “직무수행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절차 등을 위반”한 경우에 의무 없는 일을 한 때로 본다는 것이다. 지난 5일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재판에서는 ‘원칙·기준·절차’를 어느 수준에서 도출할 것인지를 두고 공방이 오갔다.

피고인 측은 원칙·기준·절차가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법률에 명시돼 있어야 한다며, 그게 없다면 함부로 ‘의무 없는 일’을 했다고 평가해선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심의관의 보고서 작성에 무슨 원칙·기준·절차가 있느냐”고 했다. “상급자가 나한테 보고하라고 하급자에게 시키는 것은 직무의 구체적인 집행 절차가 법령에 명시돼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또 하급자에게 고유한 권한이 부여돼 있지도 않을 겁니다. (…) 심의관의 직무집행의 기준과 절차가 구체적으로 명시된 법령을 제시해야 됩니다. 없으면 ‘의무 없는 일’이 아닌 겁니다. 직무상 의무를 이행한 겁니다.”(이민걸 전 실장 측 민병훈 변호사)

반면 검찰은 원칙·기준·절차를 최상위법인 헌법이나 각종 법령에서 도출할 수 있다고 했다.

“천태만상으로 일어나는 행정 영역에서의 행위를 모두 사전적으로 예측해서 원칙·기준·절차를 규정으로 명시한다는 것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 심의관이 법관 독립을 저해하는 방향의 연구나 검토에 부응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기준·절차를 도출하는 것은 크게 어려움이 없습니다. 헌법, 법원조직법, 법관윤리강령이 있습니다.”(남철우 검사)

이 사건을 심리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의 우배석 김용신 판사가 말했다. “공무원이 영혼이 없으면 되나, 원칙을 위반하는 정도는 규율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차원에서, (대법원 법리가) 나온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 듭니다.” 민 변호사가 답했다. “보고서 작성이 심의관들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정도인가요? 그러면 영혼 없는 공무원은 다 처벌해야 합니까? 영혼은 누가 규정합니까? 누가 선거에서 이기면 영혼이 달라집니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수행한 하급공무원들의 영혼 없음이 문제된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정권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직자가 돼선 안 된다”는 말을 했고, 국회에선 위법한 직무상 명령은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영혼 없는 공무원 방지법’이 등장했다.

■“심의관은 요리 재료 만들어줄 뿐”

사법농단 재판과 맞물려 법원에선 직권남용죄 처벌 범위를 좁히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구회근)는 권양숙 여사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미행하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해 직권남용죄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에서 1심 유죄를 2심 무죄로 바꿨다.

이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대공·대정부전복·방첩 등 보안정보 수집에 관한 직권을 남용해 민간인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린 게 위법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하급자의 정보 수집과 관련한 기준·절차 규정이 없고, 직원은 원 전 원장의 보조자였을 뿐이라면서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위법한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주 구체적인 실무 영역에 대해서까지 법에 절차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무원의 영혼’ 이야기는 시시각각 다르게 활용된다. 신광렬·조의연·성창호 판사의 1심 재판에서는 피고인 측이 심의관은 영혼 없는 공무원이 아니라면서, 이들이 작성한 문건 내용이 검찰 주장대로 부적절한 게 아니라고 따졌다. 지난 1월6일 김민수 판사가 증인으로 나왔을 때다. 김 판사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있으면서 검찰의 법관 비리 수사에 대한 대책 문건을 작성했다. 조 판사 측 변호인이 ‘위기 상황 도래 전에 언론 관심을 검찰로 돌린다’는 기재에 대해 물었다.

“증인은 실장과 차장 지시로 (이 내용을) 적었다고 했는데요. 그러면 실장에게 ‘그렇다고 검찰이 무서워서 법원 수사하지 말자고 할까요’라는 얘기는 안 해봤습니까?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이 ‘영혼 없는 공무원’도 아닐 것이고요. (문건을) 쓰면서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조 판사 측 송봉준 변호사)

“그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김 판사)

“‘아, 이래도 되나? 이거 위법한 것 아니야? 적절한 것이냐?’ 식의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까?”

“너무 바빠서 깊이 있게 생각을 못해봤습니다.”

피고인들이 말하는 법관의 모습은 극단을 오간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일 땐 윗선 지시에 따라야 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었다가, 일선에서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일 땐 법원행정처 등 어떤 외부 간섭도 떨쳐내야 하는 영혼 있는 공무원이 된다.

심의관이 생각하는 심의관은 어떤 역할이었을까. 기획조정실 심의관이었던 정다주 판사가 후임에게 주려고 작성한 ‘업무인수인계서’ 문건에는 심의관이 무엇인지가 적혀 있다. “기조실은 정무적 감각이 생명임” “매일 1회 이상 인터넷 네이버 등에서 법원, 법관, 판사 등의 검색어를 입력해 뉴스를 검색해 공보관실 뉴스에 없는 특이한 뉴스가 있을 경우 즉시 보고하여야 함” 등 문구가 나온다. 예산 업무는 법원행정처 업무 중에서도 중요하다. “판사라는 마인드를 버리고, 심의관 마인드에서 접근해야 함. 그들(국회·기재부)이 갑(甲)임.”(문건 중)

대법원장 비서실 판사가 폐지됐지만 기획조정실이 사실상 비서실 판사 역할을 했다. “비서실 판사가 없어지면서 그 역할을 맡고 있음” “하지만 스탠스가 애매해 지시가 있을 경우에만 움직이면 될 것임. 작년 초에는 (대법원장) 말씀 업무와 함께 매주 3회 정도 오전에 비서실장님을 뵙고 지원이 필요한 사항이 있으신지 체크했음”(문건 중).

심의관일 때 윗선 지시를 받아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태스크포스팀(TFT)에서 예상 판결 내용과 파장 등을 분석한 이은상 전 판사는 지난 5월25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나와 심의관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TFT의 주무 실·국장님들이 어떤 스탠스를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그냥 하는 겁니다. 짜장면 만들지, 짬뽕 만들지 모르겠지만 일단 양파를 깎으라면 깎는 겁니다. 의사결정권자님이 하실 문제이고, 현재도 그렇고 그때도 특별히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 전 판사가 작성에 참여한 문건은 나중에 재판 개입에 활용됐다.

사법농단 재판 중 핵심 인물인 이규진 전 상임위원과 이민걸 전 실장, 심상철 전 서울고등법원장, 방창현 판사에 대한 1심 재판은 다음달 말 끝난다. 내년 초 판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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